봉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문성군 이건(李健) 1560~1623    파명:봉성군(鳳城君)
 문성군은 이건(李健, 1560~1623)은 조선 중기의 종실로 휘는 건(健), 자는 중이(仲以)이다. 제9대 성종대왕의 제9왕자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손 안남군(安南君) 이수련(李壽鍊)이며, 어머니는 병사(兵使) 안동인(安東人) 김공석(金公奭)의 딸로 안동현부인 김씨와 봉사(奉事) 청송인(靑松人) 심봉(沈崶)의 딸로 청송현부인(靑松縣夫人) 심씨(沈氏)이다. 청송현부인 심씨 소생이다.
왕손 안남군의 4남으로 경신 1560년(명종 15) 10월 11일 탄생하여 초수 문성부정(文城副正)에 책봉되었다. 16세에 제11대 중종대왕의 제6왕자 봉성군(鳳城君) 완(岏)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봉성군은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옥사 때에 이모부인 김명윤이 제12대 인종대왕의 외숙 윤임 일파들이 경원대군(명종) 대신 계림군이나 나이가 어린 봉성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역모 고변에 사사되고, 제14대 선조대왕이 그 원통함을 풀어 주고 봉작(封爵)을 회복시키고, 문성군으로 후사를 세워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임진왜란 시절 1593년(선조 26)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로 제수되고, 1594년(선조 27) 11월 13일 문성군 등 70여 인이 상소하여 종친의 과거 응시를 허락할 것 등을 연명 상소하였다.
1595년(선조 28) 선조대왕 명나라 장수 유격(遊擊) 진금홍(陳金鴻)을 접견하고 적(왜군)의 형세를 하문할 때 문성군은 배신(陪臣)이 주례(酒禮)를 행하였다.
1596년(선조 29) 9월 19일 사헌부에서 능 참배할 때 호종(扈從)하지 않았다는 상소로 연일 추고하라 하였지만 선조대왕이 파직시키는 것은 과중하다며, 파직을 물렸다.
1599년(선조 32) 7월 24일 문성군은 의인왕후 박씨 (懿仁王后 朴氏)를 호종하며 수안(遂安)에서 있을 때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로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1급이 가자(加資) 되고, 이해 11월 14일에는 필단(匹段) 1필(疋)을 하사(下賜) 받았다.
1604년(선조 37) 8월 12일 문성군 휘호(徽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선조대왕이 답하길, "나는 신하들에게 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종척들에게도 죄를 얻었으므로 낯을 들 수가 없는데 어찌 호를 더할 수 있겠는가. 나를 아주 저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며 사양 하였다.
1606년(선조 39) 4월 12일 선조대왕이 남별궁에 거둥하여 중국 사신에게 익일연(翌日宴)을 행할 때 문성군은 행주(行酒)하였다.
1617년(광해 9) 11월 25일 인목왕후 폐비 정청 할 때, 문성군(文城君) 의논드리길, "지금 이 막대한 논의에 대하여 무식한 종친이 비록 함부로 논의하지는 못합니다만 그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공론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1618년(광해 10) 9월 2일 선조왕자 의창군 이광이 처삼촌이던 허균(許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자 문성군이 왕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왕자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 등이 당하관 종친들을 거느리고 의창군 이광을 처벌할 것 연일 주청하니, 광해군이 "의창군 이광을 위리 안치시킨 것 또한 나의 마음이 아니었다. 이밖에 어떻게 형을 더 가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계해 1623년(광해 15) 3월 26일 향년 64세로 별세하여 묘소는 봉성군(鳯城君) 묘계하(墓階下) 계좌(癸坐)로 모셨다.
배위는 계림현부인(鷄林縣夫人) 김씨(金氏)이니 평난공신(平難功臣) 좌의정(左議政) 계림부원군(慶林府院君) 충익공(忠翼公) 김명원(金命元)의 따님이다. 1560년(명종 15) 7월 1일 탄생하여 1587년(선조 20) 2월 9일 향년 28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합폄(合窆) 하였다. 자녀로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시림군(始林君) 세준(世俊)이고, 딸은 돈녕부 도정 구인기(具仁基)에게 출가하였다.
배위는 청주현부인(淸州縣夫人) 경씨(慶氏)이니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판서 경시굉(慶時宏)의 따님이다. 9월 25일 탄생하여 1599년(선조 32) 7월 7일 별세하였다. 묘소는 여주 양화역(楊花驛) 월곡(月谷) 정좌(丁坐)이다. 자녀는 무후(無後)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예향(禮香)은 자녀는 1남을 두었으니, 아들은 한양수(漢陽守) 세주(世柱)이다.

그의 행적은 허목(許穆)의 《기언(記言)》 별집 권24 〈문성군 묘비명〉, 남용익(南龍翼)의 《호곡집(壺谷集)》 권8 〈문성군 묘갈명〉, 조현명(趙顯命)의 《귀록집(歸鹿集)》 권17 〈문성군 시장(謚狀)〉 등에 자세하다.